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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유래

장천면 유래

마을이 형성된 역사는 알지 못하나 마을 앞을 흐르는 내(川)의 길이가 길다하여 長川(장천)이라 하고 위를 "上場", 아래를 "下場"이라고 하였다.

상장리 유래

  • 상장1리
    • 바지미·바자미(巴岑파잠)·선교동(仙橋洞) : 시민골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약200 여 년 전 이 부락에 처음 살게된 巴岑(파잠)이란 호를 가진 사람의 아호를따서 파잠이라 부르다가 변음 되어 바자미, 혹은 바지미라 부르며, 마을 앞으로 漢川이 흐르고 있는데 선교동이라고도 불렀다.
    • 시민골·심은골·화은(華隱) : 장천시장에서 남동쪽으로 약 500여 m 떨어져 있는 마을로서 임진왜란 당시, 深谷 張悌元(장제원)이란 사람이 피란 와서 살았는데 그때부터 부락명을 華隱이라 하였고, 그 후 시민골 혹은 심은골로 불렀다.
      또,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 고장 사람 黃士忠이라는 분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배다리 나루"에서 왜적을 격퇴시켰다. 골짜기가 깊어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숨어서 피난하였다 하여 "심은골"이라 한다.
  • 상장2리
    • 웃장터·장내·장터·장천(長川)·상장동(上場洞)·상장(上場): 1923년 면소재지를 지금의 하장2리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나서 옛 장터를 아래 장터라 하고, 새 장터를 웃 장터·상장이라 하였으며, 현재는 매월 5의 배수인 날에 정기적으로 시장이 열리며, 우시장이 옛날부터 유명하였다. 상장동에서 제일 크고 행정기관이 모여 있는 곳을 장내·장터 또는 장천이라 한다.
  • 상장3리
    • 새곰실·덕제(德堤) : 장천면으로 개칭되기 전의 이름인 熊谷坊의 熊字에서 생긴 말로 지금의 下場1洞 곰실보다 늦게 새로 생긴 마을이라서 새곰실로 부르게 되었다. 새곰실을 덕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金世鐸선생을 추모하여 그의 후손들이 세운 永慕齋가 있다.
    • 덕수징이·덕수디이 : 새곰실 앞을 흐르는 개울 건너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이 마을 북동쪽에 정자가 하나 있었는데 그 정자의 이름을 德堤亭이었고 그 이름을 따서 덕시정이라 부르다가 음운 변천에 의하여 덕수징이·덕수디이 라고 부르는데 지금은 그 정자는 없고, 정확한 위치도 알 길이 없다.
      또는, 신라 경순왕 때 이 마을에 공동우물이 있었는데 인근 동리 사람들이 다 먹고도 남을 만큼 수원이 풍부하고 좋다. 하여 생겨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신장리 유래

  • 신장1리
    • 신기동(新長洞) : 넓은 들 한가운데 새로 터(基) 잡아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다는 유래에서 新基洞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넓은 농경지와 과수원이 많으며, 40여 가구 정도의 마을로 張氏가 주가 되며, 각성이 모여 살고 있다.
    • 골마·골마을 : 신장동의 중심 마을인 삼학동에서 북쪽으로 5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개골에 마을이 있다 하여 골마라 하였고, 조그마한 암자가 있었다.
  • 신장2리
    • 작골·작곡(作谷)·산성동(山城洞) : 삼학동의 서편에 위치하며, 임진왜란 때 의병 곽재우 장군이 활약했던 천생산성이 있는 산 입구에 형성된 마을이라 하여 산성동이라고도 하고 혹은 작골이란 이름이 붙었다. 현재는 30여가구 정도가 살고 있으나, 유원지로 개발될 가능성이 있어 발전의 여지가 있는 마을이며 각성이 살고 있다.
    • 삼학동 : 마을 옆에 있는 산이 흡사 학 세 마리가 날아가는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三鶴洞 이라 불리어오고 있다.

하장리 유래

  • 하장1리
    • 큰곰실 : 지금의 장천면을 북웅곡방(北熊谷坊)으로 부를 당시 면소재지로 되어 있으므로 곰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 上場洞의 새곰실이 생겨난 후부터 큰 곰실이라 했고, 국도의 위쪽에 있다하여 上道洞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 섶밭마·신전동(新田洞)·下道洞 : 큰 곰실 서쪽에 흐르는 내를 건너 숲이 많이 우거진 동네였으며 섶밭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국도 아래에 있었으므로 下道洞이라 불렀다.
    • 중뜸·중리(中里) : 이 마을은 장천면의 국도 위쪽에 위치하고 있는 상도동과 국도 아래쪽에 있는 하도동과 중간에 지점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중뜸 또는 중리라 부르게 되었다.
      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 곳에 살던 큰 곰 두 마리가 싸움을 벌였는데, 이긴 곰 쪽의 동네를 "큰 곰실" 진 곰쪽의 동네를 "작은 곰실"이라고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 하장2리
    • 아랫장터·하장(下場)·구장터(舊場-) : 본래 장천 시장이 이 곳에 있다가 지금의 上場洞으로 옮겨갔으므로 아래장터라 부르고 있다.

금산리 유래

  • 남실 : 남실·남곡(藍谷)·여곡(余谷·웅곡(熊谷) 금산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熊谷坊에서 장천면으로 개칭할 당시, 그 부락에 살고있는 사람들이 생활에 여유가 있다하여 남실, 여곡으로 일컫고 있다.
    또, 이조때 이 곳에 절이 있었는데 스님들의 식량을 대주는 쌀바위(米出岩)가 있었다. 한다. 매일 먹을 만큼 밖에 안나오는 쌀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 욕심 많은 중 한 분이 구멍을 뚫으면 더 많이 나오리라는 생각에서 큰 구멍을 뚫었더니 빈대들만 무수히 나와서 결국 절이 망했다는 전설과 함께 "절골"로 불리 우고 있다.
  • 바깥마·항굼·텃골·基洞 : 숯골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임진왜란 후 생긴 부락인데 朴處士라는 사람이 그 마을 터가 좋은 마을이라고 하여 부락 명을 텃골로 부르게 되었고, 텃골 남쪽에 있는 마을을 바깥마, 또는 항굼이라 부른다.
  • 숯골·금화(錦華) : 남실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뒤산에 숯을 구웠던 굴이 있어서 숯골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그 후 熊谷坊을 장천면으로 개칭할 때 부락의 뒷산 이름을 따서 錦華라 부르기 시작했다.

상림리 유래

  • 상림(上林) :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烏池洞과 몽대면의 문수동 일부 를 합병하여 상림동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산동읍 백현동으로 넘어가는 곰재와 작은굴이 하나 형성된 바위가 있는 錦山洞 가는 길의 왼쪽에 위치한 굴바위 부근에는 松林이 울창하다.
    또, 상림역이 있었으며, 이 제도는 신라 소지왕 9년(487)부터 생긴 것으로, 관청의 물건이나 문서를 전달하였다. 말 6필과 역리 227명이 이에 종사하였다. 고려 때 국립여관인 "上林院(상림원)"이 있던 곳이다.
    옛날 이곳에 말을 길렀으며, "말방앗간"(연자방아)이 있었다고 한다.
    오래 전부터 추수감사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어느 해 음식을 장만하던 중 길 가던 나그네가 떡 솥에 손을 대니 손이 붙어 버리는 이변이 일어났다.
    그 후부터 마을 사람들은 앞산에 서당을 짓고 "동네산"이라 하여 음력 정초면 제사를 지내고 서로 협동하고 생산하는 기풍을 이어 왔다고 한다.

오로리 유래

  • 오로1리
    • 뚱절·중화(中和) : 中坪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설곡·오로실·장구목에서 내려오는 개울물이 서로 합해져서 내려가는 중간지점에 있어서 中和라고 부르며, 부락이 커다란 밭뚝에 있고, 뒷산이 절벽 같은 산이 라서 뚝절로 부르다가 변음 되어 뚱절로 불리고 있다.
    • 새마·중평 : 장구목·설곡·오로실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수하는 중간 평야에 있는 마을이므로 中과坪이라 부르며, 또 새마라고 한다.
    • 설곡(雪谷·薛谷) : 중평의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서 임란 전에 薛氏·咸 陽 朴氏·海州 吳氏 三姓이 살았는데, 薛氏가 중심을 이루고 살았다. 그리하여 설곡으로 불리우게 되었는데 일제 때에 雪谷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설곡 마을의 뒤 골짜기에 울바우골이 있는데 그 곳 산꼭대기에 있는 큰 바위와 칠곡군 架山山城에 있는 가산바위가 자웅(雌雄)을 이루어 가끔 바위가 울었다는 전설에 따라 오암(嗚岩)이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다.
  • 오로2리
    • 오류실(五柳室)·오로실(五老室) : 장천면 오로지(五老池) 안쪽에 위치하며, 군위군과 경계로 지 가산(芝 歌山) 능선이 남쪽으로 뻗어 내리는 아늑한 곳 에 터를 잡아 전통적인 산남수북(山南水北)의 양지바른 작은 동네로서, 서기 1500년대 말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오금리에서 살던 밀양 朴氏 박준(朴雋) 선생이 이곳에 피난 와서 살게 되어 세거한 곳이다.
      선생은 호를 노은(老隱)이라 하고 고향을 그리워하여 고향 동리 첫 글자와 자신의 호의 첫 글자를 따서 오로실(五老室)이라고 동네 이름을 지었다.
      後에 선생의 현손 5형제(永澤, 永善, 永發, 永達, 永郁)가 동네 입구에 느티나무와 버드나무를 가가 한 그루씩 심어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성하다.
      마을에는 朴雋(준) 선생의 追慕所인 老隱堂이 있으며, 그5세손인朴永達 선생의 후손들이 건축한 春雨享이 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동구의 다섯 나무 때문에 동네 이름이 오로실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 미륵당·불당리(佛當里)·신기(新基) : 오로실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마을뒤에 미륵불이 있어서 생겨난 동명이며, 지금도 미륵불이 보존되고 있고, 불당리·신기리라 부르기도 한다.
      1950년 건립한 "마애여래좌상"과 고로봉에는 고려시대 유물로 추정되는 돌탑 재료들이 흩어져 있다.

묵어리 유래

  • 묵어1리
    • 머들·먹들·묵들·묵야(墨野)·묵어(墨語)·묵평(墨坪) : 마을 앞의 논밭의 흙 빛깔이 검고 기름성분이 많은 들판이라서 묵들· 먹들·묵야·墨坪·머들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무들(머들)로 불리우고 있는데 말썽 없이 조용히 사는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 웃머들·상평(上坪)
      약 360여 년 전에 崔薺라는 사람이 이 동네에 살았었는데 그가 동네 앞의 들 이름을 墨野라고 부르게되어 머들이 되었고, 묵야에 동네가 둘 생겼는데 위쪽에 있는 마을을 웃머들, 上坪이라고 불렀다.
  • 묵어2리
    • 강산골·江山谷·강성동(綱城洞) : 三山 남쪽에 있는 마을로 약 200여 년 전에 학문이 높은 仁同張氏 성을 가진 한 노인이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이 부근을 지나다가, 어느 집에서 하룻밤을 유숙하게 되었다. 어디로 가는 사람이냐고 주인이 물으니, 살 터전을 찾아 길을 나선 나그네라는 말에, 그러면 이 마을에 漢文을 가르치며, 후진을 교육해 달라고 간청하자 쾌히 승낙하고 정착하였다. 綱城洞이라는 洞名의 綱字는 三 綱을 지키며 살자는 뜻에서 썻고, 부락의 뒤산이 성과 같이 생겼으므로 綱城洞 이라고 하였고, 강산골·강산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백고개(배티고개) 옛날에는 이곳에 도적이 많아 백사람이 모여서 함께 넘었다는 데서 유래되었으며, "꼼비기산"은 7월 달에 머슴들이 이 산에 모여 노는 곳이라 하여 생겼다고 한다.
    • 삼산 : 웃머들의 동쪽인 錦井山 기슭에 있는 마을로서 1923년 이전에는 허천이라고 불렀으나, 그 곳이 錦井山 3개의 기슭에 있는 마을이어서 三山이라 부른다.

여남리 유래

  • 여토실(汝吐谷) : 여남동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서 옛날에는 亡國이라고 부르다가 그 뜻이 나라가 망하면 동네도 망한다 하여 새로이 붙인 洞名이며, 물이 풍부하고 농사도 잘 지을 수 있는 풍요로운 마을이라하여 붙인 이름
    또, 이조 선조때(1590년경)에는 지금의 여수동 못 부근에 동네가 있었으나, 산짐승의 피해가 잦아 남쪽으로 옮겨 정착하고, 그 동네를 汝南洞이라 하였다 한다. 앞들을 "평생들"이라고 하는데 한해 농사를 지어 평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곡식이 잘 된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 복골·봇골·복곡(福谷)·여수(麗水) : 여토실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앞에 보(洑)가 있어서 복골·봇골·복곡(福谷)이라고 하였고, 그 보에 흐르는 물이 너무나 맑아서 여수(麗水)라는 이름도 있다.
  • 딱밭골·지신동·저전동(楮田洞) : 복골에서 남동쪽으로 보이는, 明谷洞과 경계 지역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뒤에 딱밭이 성하여서 楮田洞이라 부르고 지신동으로도 통용되고 있다.

명곡리 유래

  • 가마실·가매실·서당뜸·부곡동(釜谷洞) : 명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부락의 모양이 가마솥 같이 생겼다 하여 가마실 혹은 가매실이라 부르고 거기에 해당하는 한자음으로 표기하니 釜谷리洞이되었으며, 서당뜸은, 가매실의 동쪽 마을로서 경주 김씨의 書堂이 있었다고 붙여 진 이름이며, 북쪽의 윗가매실을 웃마라고 부른다.
    또, 1870년경부터 이곳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을 먹는 사람은 모두 힘이 세어서 이 우물을 "氣井, 奇井"이라 하였다. 그후 힘센 장사들이 오고가는 사람을 괴롭혔기 때문에 이 샘을 매워 버렸는데 그 후 다시 파서 우물로 사용하고 있으나, 그 때의 물줄기는 찿을 길이 없다고 한다. 농헌 李明達(이명달) 선생이 존묘소인 "농헌재(聾軒齋)"가 있다.
  • 솔방재, 수명동 : 가매실에서 보면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솔개가 날아가는 모양이어서 솔방재라는 동명이 붙었고, 고개 아래에 있는 동네인데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솟아나는 곳이어서 水明洞이라는 이름이 붙게되었다
    ※1914년 리·동 폐합 당시 수명동과 부곡동을 합쳐 수명동의 明자와 부곡동의谷자를 합쳐서 명곡동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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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
2023-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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