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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소개

새마을 운동의 배경

정치적 배경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온 우리나라는 반도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수많은 국난과 세계열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그들의 힘의 격전지가 되어 왔다.

그중 우리 민족에게 가장 불운한 시대로 기억되는 36년간의 일본 무력통치는 극도의 억압으로 우리 민족에게 항상 불안과 공포를 심어주어 올바른 가치판단과 사고를 억제해 놓았다. 이로써 36년간의 일제 식민지시대는 우리의 민족성마저도 서로 간의 반목과 갈등, 시기와 질투로 바꾸어 놓았으며, 기회주의적인 사고와 생활을 보편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급변하는 세계사 속에서 자국의 힘을 하나로 뭉쳐 국가 발전에 총력을 기울여도 부족할 시기에 일본이라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상황을 겪게 된 우리는 자율보다는 타율을, 자신의 노력보다는 기회를 엿보는 생활습관이 사회 전반에 만연돼 가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이하게 되었으나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가 더욱 가중되어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극심한 사회혼란과 격동기를 겪어야만 했다. 해방과 남북분단, 미 군정과 혹은 미국 군정과 과도정부수립, 6.25 사변과 이승만정권의 독재, 4ㆍ19혁명과 장면내각 출범, 5ㆍ16 쿠테타와 박정희 정권의 출범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역사는 그야말로 혼란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일제 식민지시대와 해방, 박정희 정부의 출범에 이르는 50년간의 파행적인 역사 속에서 피폐해진 경제사정으로 인하여 생필품의 부족현상이 커지면서 외국의 원조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외국의 원조물자와 함께 들어온 외국의 정치, 경제, 문화가 비판없이 수용되어 우리 고유의 의식체계에 자기 자신의 이익과 영달만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확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 같은 국민의 의식과 사고의 변화와 권력을 잡고 있던 자유당 정권마저도 당대에 직면한 시대적, 사회적, 경제적인 문제들을 외면한 채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과 비리에만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당시 국민은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체념적 허무주의와 비관적 낭만주의에 빠져 있었고, 정치를 담당하던 정권마저도 정치 지도력의 미숙과 권력의 방종을 드러내고 있던 이즈음 구악 타파와 조국 극대화의 기치를 내걸고 1963년에 탄생한 제3 공화국은 경제발전 정책을 착실하게 추진시켜 나가면서 새로운 사회 기풍과 국민의식이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5ㆍ16 쿠테타의 연장 선상에서 세워진 제3공화국의 정당성에 대한 정치적, 국민적 지지가 완벽하지 못한 데서 오는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제3공화국에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여기에 1971년의 양대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면서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 정권의 주요 정치기반이었던 농촌의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여 의석비율이 14%로 하락하게 되자(합동 통신사. 1968),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농촌의 지지율을 높일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과 공화당은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촌 지역의 생산소득 증대와 생활환경 개선사업에 치중하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농촌 사회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 정치적 산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1970년 4월 22일,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한해 대책 지방 장관 회의에서 밝힌 것처럼 이타적이고 체념적인 사회의식을 타파하고 자주적이고 적극적인 의식구조를 국민에게 불어 넣으며 수 대의 가난을 벗고 잘사는 농촌, 잘 사는 나라를 이룩하고자 하는 개인적인 소망이기도 하였다.

경제적 배경

1945년 해방으로부터 1960년대 말까지 우리나라는 국가 전반에 걸쳐 극빈과 혼란의 시대였다.

해방 당시에는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50달러였고 1950년대에는 65달러에 불과하였으며, 1960년대는 85달러 정도여서 국민 대다수가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여기에 36년간의 일본 식민지와 6.25사변의 후유증이 겹쳐 우리 강토는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져 있었으며, 홍수와 가뭄으로 농사는 흉작일 때가 다반사였기 때문에 대다수의 국민이 미국의 양곡 지원계획에 의해 밀가루로 생활을 연명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당 정권을 허물고 탄생한 군사정부가 내건 경제건설과 사회질서 확립의 기치는 국민에게서 상당한 호응을 얻게 되었으며, 국민에게 큰 희망이 되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1967년부터 서서히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1970년대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은 257달러로 증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부터 발생하기 시작한 도농 간·지역 간의 소득 격차와 생활환경의 격차는 해방 이후 좁혀지는 듯하다가 196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더 심화하여 나타났다.

1950~1960년대에 여러 가지 농업정책이 행해지기는 하였지만, 그 성과는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고 간격의 폭만 더욱 커졌다. 도시근로자와 농가의 소득과 가계비 지출은 현저히 차이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경제기획원, 1963 ~1972) 그로 인해 농민들은 도시의 삶 자체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고 도시로의 사회적 이동을 심화시켜 농촌은 과소화되고 도시는 과밀화에 시달리는 상황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도농 간·지역 간의 경제적 격차는 국민 상호 간의 이질화와 위화감을 조성함으로써 국민화합에도 큰 걸림돌로 작용하게 되었고, 나아가 국가안보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소수이기는 하였지만, 경영개선으로 성공한 농가가 생겨나 오게 되자 정부는 이들을 기반으로 하여 농촌개발사업을 시행할 수 있겠다(경제기획원, 1963~1972)라는 판단 아래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촌개발사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또 앞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농촌에서부터 경제발전을 도모할 필요성이 절실히 요구되어 새마을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국민운동이 농촌에서부터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하기에 이르렀다. 새마을운동에 착안하던 시기 극도의 빈곤과 열악한 생활환경에 시달리던 농촌에서는 희망을 찾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농민들의 상대적 빈곤감과 허탈감, 공허감을 새마을운동이 비집고 들어가 농촌도 '잘 살 수 있다'라는 희망을 심어주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는 농촌의 부흥을 위해서는 먼저 공업을 발전시키고 그 과정에서 농촌개발사업을 추진시켜 나가게 되었다. 그 결과 1960년대 경제 발전 5개년계획을 추진하여 경제건설과 수출진흥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옴으로써 농촌 개발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을 마련하게 되었다.

사회적 배경

농촌에서의 삶에 대한 희망이 사라진 시기에 막연한 동경으로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인구가 크게 늘어 사회적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었다.

그러나 농촌은 여전히 경제적, 사회적 환경의 낙후성과 생활환경의 열악을 탈피하지 못한 채 농촌의 마을구조, 거주시설, 도로, 상ㆍ하수도 등 인간의 주거생활에 필요한 기본적 사항까지도 지극히 미흡하여 최소한의 문화적 생활여건조차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농촌인구의 도시유출을 막고 현재 사는 주민들의 삶의 편의를 높이기 위해서 농촌생활환경의 개선이 시급히 요구되었다. 막대한 재원과 인력이 있어야 하는 농촌생활환경 개선사업은 정부의 예산 지원만으로는 불가능하여, 농민 개개인의 적극적인 참여와 노력이 전제되었다. 이같이 농민들의 노력과 부담을 전제로 하여 조국 근대화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편협된 개인주의와 안일한 사고로 일관해 오던 농민에게 새마을운동은 의식구조의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잘 사는 마을,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잘못된 의식과 행동의 변화가 필요하였으며,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소수의 국민이나 일부 특정집단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였고 전 국민의 참여 속에서 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범국민운동으로 새마을운동이 국민의식과 행동의 변화를 위해서라는 필요성에 의해 태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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