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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소개

시대별 새마을 운동

1970년대 새마을 운동

1970년 4월 22일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제창으로 시작된 새마을운동은 '우리 마을을 우리 힘으로 새롭게 바꾸어 보자'는 운동으로 농촌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초가집 없애기(지붕개량), 블록 담장으로 바꾸기, 마을 안길 넓히고 포장하기, 다리놓기, 농로(논밭으로 이어지는 길) 넓히기, 공동빨래터 설치 등의 기초적인 환경개선사업을 하였다. 이 사업의 성과로 마을이 아담하고 쾌적한 모습으로 달라지자 주민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마을회관 건립, 상수도 설치, 소하천 정비, 복합영농 추친, 축산, 특용작물 재배 등을 통해 70년대 중반에는 농가소득이 도시 근로자 소득수준으로 향상됨으로써 농촌주민에게 '하면 된다'는 의식과 성취동기를 부여하여 생기 가 넘치는 농촌이 조성되었다.

이처럼 새마을운동이 농촌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자 1974년부터는 도시로 퍼져나갔다. 도시지역은 물론 직장과 공장 그리고 학교까지도 새마을 깃발이 날리고 분야별로 발전을 꾀하기 위한 일거리를 만들어 실천에 옮겨 나갔다. 도시지역에서는 반상회가 활성화되어 이웃 알기와 새마을대청소(내집앞 내가 쓸기), 저축하기와 거리질서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직장과 공장에서는 건전한 직장분위기 조성운동으로 시작되어 새마을분임조 활동을 통한 생산성 향상과 물자절약, 노사관계 정립에 중점을 두었으며, 학교에서는 인사 잘하기, 부모 공경하기 등 예절교육을 실시해 나갔다. 70년대 새마을운동은 이와 같이 우리 나라 방방곡곡에 메아리치면서 전국적인 범국민운동 으로 자리잡게 됨으로써 조국을 근대화 시키는 뒷받침 역할을 하였다.

1980년대 새마을 운동

새마을운동은 80년대에 정치·사회·경제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일시적인 정체가 있었다. 그러나 국민운동으로 계속해서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에 따라 1980년 12월 1일 현재의 새마을운동중앙회가 사단법인으로 발족되었다. 이는 새마을운동이 정부 추진방식에서 민간조직(단체)위주로 탈바꿈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이다.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사업을 효율적으로 펼쳐나가기 위해 6개의 회원단체(새마을지도자중앙회, 새마을부녀회중앙연합회, 직장새마을운동중앙회, 공장새마을운동추진본부, 새마을문고중앙회, 새마을금고연합회)와 2개의 연수원(중앙연수원, 남부연수원)을 조직화하여 각종 사업을 전개하였다.

80년대 새마을운동의 특징은 빠른 경제성장의 부작용으로 인한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등 주로 국민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정신적 운동에 중점을 두고 추진해 나갔다. 그 대표적 사업으로 식생활 개선, 소비절약, 재활용품 모으기, 독서생활화, 근검절약, 저축, 새마을정신교육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주요 실적으로는 전국토 공원화운동을 통해 쾌적한 자연환경을 만들어 나갔으며, 특히 86아시안게임, 88 서울올림픽대회를 맞이하여 새마을지도자들이 질서·친절·청결 등 3대 시민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 행사 의 성공적 개최에 기여하였다.

1990년대 새마을 운동

90년대 초기 민주화·개방화 흐름에 따라 사회 곳곳에서 자기 몫을 챙기겠다는 지나친 이기주의와 탈법·불법, 무질서, 과소비가 판을 치면서 사회적 갈등이 빚어졌다. 대충대충하는 적당주의, 왜곡된 교육열, 무조건 쓰고 보자는 과소비, 일확천금을 꿈꾸는 한탕주의, 빨리빨리 조급증 등을 총칭해서 일컫는 한국병 이란 말이 유행되었고 근로자들이 힘든 일, 궂은 일, 어려운 일을 기피하는 풍조를 두고 이른바 3D현상이란 새로운 용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새마을운동은 건강한 사회건설을 위한 국민의식 개혁운동, 환경보전운동, 농어촌가꾸기운동, 이웃사랑운동 등에 중점을 두었다. 주요사업에 있어서는 도덕성 회복을 위한 사치, 향락, 과 소비 추방, 땀흘려 일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30분 일 더하기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였으며, 환경운동 차원에서 재활용품수집운동과 쓰레기 분리수거, 음식물쓰레기 안 남기기, 소하천 살리기운동을 계속해서 펼쳐나갔다.

97년에는 IMF사태를 전후하여 경제살리기 국민저축운동, 나라사랑 금모으기운동을 주도하여 국가위기극복에 기여하는 등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후에도 KBS와 공동으로 실직가정 및 결식아동 돕기 모금방송을 3차에 걸쳐 추진하는 한편 전국 읍면동 단위에는 민간사회안전망협의체를 구성하여 지역 내 소외계층을 돕는데 앞장섰다. 또한 92년부터 추진한 살기 좋은 고장가꾸기 사례교환을 위한 한ㆍ일 국제교류대회가 지속 추진되었고, 러시아 연해주 농업협력사업과 베트남 새마을협력사업을 계기로 해외 현지 새마을운동이 본격화 되었다. 또한 90년대 후반 민간차원의 대북교류 사업이 시작되면서 새마을단체도 젖 염소, 겨울의류, 감귤보내기 등의 대북 지원 사업에 동참했다.

2000년대 새마을 운동

2000년대에는 ‘제2의 새마을운동’을 선포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사회 만들기’를 새로운 이념으로 하여 지역현장 중심의 봉사기능 강화, 사회 각급 조직과의 연대협력, 행정과의 건전한 파터너십 구축, 조직 자율역량 제고 등 민간자율운동으로서의 노력을 해왔다. 초기 운동과제로는 생활의식개혁운동, 민간사회안전망운동, 환경보전운동, 지역활력화운동, 통일 및 국제화운동에 역점을 두었다. 이와 함께 2002 월드컵 맞이 질서ㆍ친절ㆍ청결ㆍ공중도덕 지키기 분야 10대 실천과제를 추진하면서 거리청결과 도심미관 조성에 주력하였다. 2000년도에는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교류사업이 진전되어 새마을운동 차원의 교류사업도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2000년 7월부터는 북한 농촌돕기 통일손수레보내기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새마을지도자 및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2006년까지 총 26,000대의 손수레를 북한에 지원했다.

이밖에도 산란 종계장 시설(병아리 및 사료 포함), 각종 농기계 및 밀가루 등의 지원을 통해 남북 화해 협력의 실현과 민족통일의 기반을 다지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2000년 중반에는 사회적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화합을 위한 ‘새정신 새나라 만들기’ 운동을 표방하여 도덕성 회복. 국민화합.환경보전에 중점을 두었다. 2003년부터 추진한 어려운 이웃을 위한 집 고쳐주기 운동과 100만 포기김장담가주기운동, 2005년에 시작한 다문화가정 한국적응 프로그램 ‘아이 러브 코리아’ 사업을 추진했다. 2007년 말에는 서해안 태안 기름유출사고와 관련 새마을가족이 초기단계부터 복구활동에 참여하여 130만 자원 활동을 이끌어내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 2008년에는 미국 발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경제살리기 모아보자 국민대행진의 일환으로 희망저금통 모으기 범국민캠페인을 벌여 15억 1,100만 원을 모아 전국 읍면동별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했다. 그밖에도 러시아, 베트남, 필리핀 이외에도 중국, 몽골, 스리랑카, 캄보디아, 네팔, 콩고민주공화국 등 저개발국에 새마을운동을 보급하여 새마을운동 종주국으로서의 위상과 대한민국의 브랜드를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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